감독 : 송해성
주연 : 최민식, 장백지
러닝타임 : 116분
전국 관객 : 약 45만
개봉일 : 2001년 4월 28일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영화 <파이란>은 시나리오에서 기획, 캐스팅에 이르기까지
범 아시아 프로젝트 멜로로 진행되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한국 여화 최초로
홍콩, 중국,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등
아시아 5개국에 총 30만불의 사전 판권계약을 성사시키며
'프리세일즈'의 첫 사례를 만들어 냈다.
비록 조금 먼저 개봉한 영화<친구>에 밀려
흥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 의미와 작품성은 인정받았다.



-줄거리
 



 강재(최민식)는 인천 뒷골목을 전전하며 사는 삼류 건달이다. 고등학생에게 포르노 비디오 테이프를 팔다가 열흘간 구류생활을 하는가 하면, 쓸데없는 공갈을 일삼는다. 돈이 생기면 경마를 하거나, 오락실을 방황하며 인형뽑기에 열중한다. 친구 용식(손병호)은 조직의 보스가 돼 있지만 강재는 새파란 후배들에게도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나이트 클럽 삐끼 신세를 면치 못한다. 희망이라곤 없는 팍팍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강재는 용식과 우연한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무의식중에 살인을 저지른 용식은 강재에게 자기 대신 감옥에 들어간다면 배를 살 돈을 주겠다고 반 협박을 한다. 강재는 ‘배 한 척 앞세우고 고향 땅을 밟겠다’는 오래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용식의 죄를 뒤집어쓰기로 한다. 비장한 결심을 한 강재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한다. 

 


오래 전 위장 결혼한 여인 파이란(장백란)의 부음이 전해진 것. 그녀는 강재가 돈을 받고 서류상으로 위장결혼을 해준 조선족 처녀였다. 파이란과의 관계를 이어준 고향 후배 경수(공형진)와 함께 그녀의 주검을 찾아가던 강재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남자’라고 믿어 준 파이란의 편지와 사진을 보고 흔들린다. 파이란의 유골을 든 강재는 바닷가에서 눈물을 흘린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강재는 귀향을 결심하고 용식을 찾아가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짐을 싸던 중 우연히 후배의 비디오에서 바닷가를 거니는 파이란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한에 잠긴 그의 목에 누군가의 밧줄이 걸리면서 강재는 그대로 숨을 거둔다.




원작 - 아사다 지로<철도원>과 영화 <파이란>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의 단편 집으로 1997년 나오키상 수상작, 140만 부의 밀리언 셀러를 기록한 책이다. 



영화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은 처녀작 <카라>제작 과정에서의 소송과 흥행 실패 때문에
<파이란>의 강재 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문득 <카라> 후반 작업 때 일본에서 만난 통역가가 권한 <철도원>에 있던 <러브레터>가 생각났다고 한다. 통역가가 말해준 줄거리를 들으면서 뭔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 올라왔고, 한국에 돌아와 그 소설을 번역을 맡겨 번역본을 보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을 때, 한국에서도 영화 <철도원>이 개봉하여 흥행을 하기 시작했고 책도 출간됐다.


송해성 감독의 시나리오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됐었다. 송해성 감독은 ‘강재’라는 캐릭터에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 빗대어 보았다고 한다. 당시 자신의 상황이 ‘강재’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작 <러브레터>의 주인공은 망자가 된 생면부지 이국 아내의 유골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송해성 감독은 ‘강재’를 죽여야만 했다고 한다. 시대상황을 한국으로 했고, 그 한국 사회는 ‘강재’같은 인간에게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강재’의 친구이자 보스인 ‘용식’의 말처럼 ‘강재’는 그 바닥 체질도 아니고 간도 작고 마음도 여리고 끈기도 없어서 맡은 일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동정 없는 세상’은 ‘강재’같은 캐릭터의 인간들을 구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재’에게 덧붙인 깡패의 서사는, 한심하게 살아온 인생과 그리하여 사랑의 흔적 앞에서 얼마나 깊은 시름과 회한에 젖게 되는 지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깡패영화, 깡패영화의 관습을 빌린 드라마,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한 인간 ‘이강재’를 위한 영화를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송해성 감독은 ‘파이란’의 캐릭터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원작에서의 ‘파이란’은 단 두장의 편지로만으로 설명되는 실체가 없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송해성 감독은 원작소설에서 ‘파이란’의 캐릭터를 강하지만 외로움이 있는 여자라고 상상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젊고 예쁜 여자라면, 게다가 조직에 엮여 팔려 다니는 몸이라면 원작에서처럼 창녀로 설정해야 현실적이었겠지만, 소설에서의 “손님들 모두 친절하지만, 일하면서 당신을 잊지 않습니다. 진짜입니다. 손님을 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열심히 되어서 손님이 기뻐합니다.”라고 하는 부분 등을 볼 때 한국의 정서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노출씬도 찍어낼 자신이 없어서 현실성이 떨이지지만 ‘파이란’을 세탁소로 보냈다고 한다. 가망 없는 인간 ‘이강재’를 구원한다는 의미와 세상을 정화하고 순수하게 베푸는 ‘파이란’의 이미지로 송해성 감독은 ‘세탁부’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송해성 감독도 ‘강재’에 포커스를 맞추느라 ‘파이란’을 현실적으로 그리지 못 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영화의 시작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을’만큼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강재’의 절망과 1년 전 부푼 꿈을 안고 한국을 찾은 ‘파이란’의 희망을 마주보게 했다. 이들은 시간과 공간이 엇갈려서 서로 만나지 못한다. 만나게 되면 멜로 성향이 짙어질 테고, 대중성을 생각하자면 그렇게 관객들을 울리는 편이 나았겠지만 송해성 감독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파이란>이라는 영화를 관객을 ‘울리는 영화’보다는 ‘술 생각나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송해성 감독의 의도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다보니 ‘강재’의 삶을 그리는 데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 것 같다. ‘강재’라는 인물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연민과 동정을 끌어내기 위해선 그래야 한다고 송해성 감독은 판단했을 것이다. 원래 촬영본에는 ‘강재’에 대한 설명이 더욱 많았다고 한다. 살인을 저지를 친구이자 보스인 ‘용식’을 대신해 감옥을 들어가기로 하면서 ‘강재’는 고향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통장번호 불러라, 나 맏아들이다, 걱정하지마라’라고 하며 큰소리치는 장면도 있었고, ‘파이란’과의 위장결혼으로 인해 받은 돈을 경마장에 날리는 장면도 있었고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강재’의 회한을 더 크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술 생각나는 영화’
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찍을 지 고민들과 그 때문에 어렵게 찍은 장면들이 많았다고 한다. 부둣가에서 ‘파이란’의 두 번째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강재’는 본래 구토를 하는 씬(scene)이였다고 한다. 송해성 감독이 의도한 구토의 의미는 ‘가슴속의 오물을 모조리 뱉어낸다, ‘파이란’을 통해 ’강재‘는 자신의 지우고 싶은 과거의 썩은 행동들을 토해낸다’ 즉, ‘파이란’을 통해 정화되었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민식의 제안으로 눈물을 흘리다 구토를 장면을 촬영하였고, 편집과정에서 구토하는 장면을 편집했다고 한다.



송해성 감독은 영화를 보고 마음먹었던 만큼 ‘흔들지 못했다’라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다른 영화에서 묘사했듯이 ‘양아치 세계’란 결코 폼 나는 곳이 아니라고 마구 흔들어 깨고 싶었다고 한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도심의 하늘처럼,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하고 위태로운 공기를 살려내고 싶었지만 송해성 감독은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파이란>을 통해 아름답고 화려한 것에 홀려 멀미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살았던 촌스럽고 투박한 이야기 볼 수 있다.



<러브레터>의 남자 주인공인 다카노 고로는 자신이 무심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나 몸에 맞아버린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포르노 숍 일 때문에 10일 구류를 갔다가 나오는 날, 자신의 아내로 등재된 ‘파이란’의 죽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감흥이 없다가 그녀의 사진과 편지, 시신을 보면서 죄책감과 안타까움, 동정심 또는 애정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눈물을 흘리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녀를 떠나보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러브레터>속의 파이란은 편지의 내용으로만 그녀를 알 수 있다. 먼저 전체적 이야기의 맥락과 두 번째 편지에서의 관리청에 잡혀갔을 때를 대비한 이야기를 통해 영화와는 달리 위장결혼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영화의 ‘파이란’과는 전혀 상반되는‘창녀’가 직업이다. 그 외에 성격적으로는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파이란>의 강재는 전체적인 내용과 주변 인물들이 그에 대해 행동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무능력하고, 여리고 책임가도 없어서 무시당하는 ‘호구’다. 하지만 ‘파이란’만이 ‘강재’의 사진 속에서의 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해주었고 악하지 못한 자신의 성격은 밑바닥에 가라앉은 최악의 선택 속에서 눈물과 함께 구원받는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파이란’은 지고지순하며 청초하고 위장결혼을 모르는 것이나 경수의 거짓말 등에 속아 넘어가는 등 어리숙하면서도, 중요한 순간 재치를 발휘해 순결만은 지켜내는 판타지적 이상형이라고 볼 수 있다. 멜로물의 전형적인 여성성의 상징으로 유형화된 그녀의 모습 이면으로는 한국의 유고적 가치의 보수성이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영화 <파이란>에서 더욱 실감나게 삼류의 인격이 살아난 강재의 이야기가 표면에 더 많이 등장함으로서 그녀의 구원자적 설정이 강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고로’나 ‘강재’ 둘 모두에게 파이란은 어떤 도덕적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고로’는 ‘파이란’이 자신의 몸이 더럽혀지고, 착취당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고로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여인에 대해 동정하기 시작함으로서, 자신의 도덕적 파렴치함을 깨닫고 ‘파이란’이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것처럼, 자신은 죽음 파이란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강재’는 ‘파이란’이 불쌍하다는 것을 통해 자신의 불쌍함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순결, 순수, 청초, 지고지순한 여인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순수함을 발견한다.



-인물분석

<러브레터>

다카노 고로 : 자신이 무심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나 몸에 맞아버린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포르노 숍 일 때문에 10일 구류를 갔다가 나오는 날, 자신의 아내로 등재된 ‘파이란’의 죽음을 알게된다. 처음에는 감흥이 없다가 그녀의 사진과 편지, 시신을 보면서 죄책감과 안타까움, 동정심 또는 애정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눈물을 흘리며 한번도 만나지 못한 그녀를 떠나보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파이란 : 편지의 내용으로만 그녀를 짐작할 수밖에 없다. 먼저 전체적 이야기의 맥락과 두 번째 편지에서의 관리청에 잡혀갔을 때를 대비한 이야기를 통해 영화와는 달리 위장결혼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영화의 ‘파이란’과는 전혀 상반되는‘창녀’가 직업이다. 그 외에 성격적으로는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파이란>


이강재
: 전체적인 내용과 주변 인물들이 그에 대해 행동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무능력하고, 여리고 책임가도 없어서 무시당하는 호구다. 하지만 ‘파이란’만이 ‘강재’의 사진속에서의 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해주었고 악하지 못한 자신의 성격은 밑바닥에 가라앉은 최악의 선택 속에서 눈물과 함께 구원받는다.


파이란
: 영화에서 묘사되는 ‘파이란’은 지고지순하며 청초하고 위장결혼을 모르는 것이나 경수의 거짓말 등에 속아 넘어가는 등 어리숙하면서도, 중요한 순간 재치를 발휘해 순결만은 지켜내는 판타지적 이상형이라고 볼 수 있다. 멜로물의 전형적인 여성성의 상징으로 유형화된 그녀의 모습 이면으로는 한국의 유고적 가치의 보수성이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영화 <파이란>에서 더욱 실감나게 삼류의 인격이 살아난 강재의 이야기가 표면에 더 많이 등장함으로서 그녀의 구원자적 설정이 강해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파이란’에 대한 감정


<러브레터>의 ‘고로’


‘파이란’의 사망 수속 때문에 경찰서에 들렸다 병원에 가서 시체를 확인하는 ‘고로’


‘파이란’의 시체를 글어 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 때 편지의 문구를 회상한다. 그날 밤, 꿈을 꾸는데 ‘파이란’과 ‘파이란’과 낳은 아들 둘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갔지만 꿈에서도 역시 ‘파이란’은 죽음을 알리지만 또 고맙다고 한다. 이에 ‘고로’는


“뭐가 친절하다는 거야. 친절하기는커녕 야쿠자, 경찰, 손님 할 것 없이 모두 함게 너를 괴롭혔는데. 그중에서 제일 지독한 놈이 나야. 오십만에 호절 팔아먹고, 그 돈 어쨌는 줄 아니? 사흘 만에 다 써버렸어. 당신 몸으로 갚아야 하는 그 돈을 말야. 피를 토하며 갚아야 하는 그 돈을 말야. 우린 전부 거머리들이야, 찰거머리들이야. 당신을 벼만 남도록 빨아먹은 귀신들이야. 어째서 이 찰거머리 귀신들에게 자꾸만 친절하다고 고맙다고 그런 말을 하니?”


“이제 일 같은 거 안 해도 돼. 파이란, 나랑 결혼해줘.”


<파이란>의 ‘강재’


‘파이란’을 찾아 가는 길, 소개소 원장을 만남 후 숙소에서 ‘파이란’의 편지를 다시 본 후,


“남편은 이강재, 직업은 쌩양아치, 친구대신 빵에가는 친절한 병신, 마누라는 뒤진년. 불쌍하게 뒤진년. 너도 불쌍 나도 불쌍 잘 만났다, 잘 만났어”


‘고로’나 ‘강재’ 둘 모두에게 파이란은 어떤 도덕적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그러나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 ‘고로’는 ‘파이란’이 자신의 몸이 더럽혀지고, 착취당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고로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여인에 대해 동정하기 시작함으로서, 자신의 도덕적 파렴치함을 깨닫고 ‘파이란’이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했던 것처럼, 자신은 죽음 파이란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강재’는 ‘파이란’이 불쌍하다는 것을 통해 자신의 불쌍함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순결, 순수, 청초, 지고지순한 여인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자신의 순수함을 발견한다.


<러브레터>와 <파이란>의 계절


<러브레터>에서의 계절은 봄·여름이지만 <파이란>에서는 겨울이다. 겨울로 설정함으로서 ‘파이란’의 오갈곳 없는 처지는 더욱 딱하게 느껴졌고, 흰 눈의 이미지와 ‘파이란’의 이미지 또한 매우 잘 어울리며 ‘파이란’의 순수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도 볼 수 있다.


‘눈’이라는 흰색을 전체적인 영화 배경에 깔면서 검은, 붉은, 흰색의 색의 조화와 대립을 통한 영화 전개를 위한 장치 일수도 있다.


‘파이란’의 직업과 의문점


영화와 원작 소설 속의 ‘파이란’은 청순하고 지고지순한 이미지의 ‘천상여자’라는 느낌이 드는 인물이다. 타국에서 온 그녀는 일본과 한국의 3류 세계의 거래에 대해 당연히 알지 못했고, 때문에 그녀는 오로지 돈을 받고 호적을 빌려준 ‘고로’와 ‘강재’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도치 않은 친절에 대한 ‘파이란’의 감사의 인사가 ‘고로’와 ‘강재’에게 그녀에 대한 연민을 일으키고, 끝내는 사랑하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게다가 영화에서는 ‘장백지’라는 배우의 희고 가녀린 외모 큰 눈망울과 긴 생머리로 ‘파이란’의 이미지를 더 극대화 시켰다고 본다.


소설과 영화에서 ‘파이란’은 ‘고맙습니다 …(중략)… 사랑합니다’의 편지를 쓰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그녀의 직업에 있다. <러브레터>의 ‘파이란’은 일본에 도착해 몸을 파는 ‘창녀’가 됐다. 야쿠자 말단 조직의 직업소개소를 통했다면 ‘파이란’의 직업은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가 체류할 수 있게끔 ‘고로’에게 지불된 비용까지 전부 그녀에게 청구되기 때문에 타국의 여인이 단기간에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액수를 만드는 방법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러브레터>의 ‘파이란’은 그렇게 정해진 수순을 밟아 ‘창녀’가 되고, 간경변증으로 사망한다. 그녀의 죽음은 ‘사토시’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는 자세히 전한다.


“그치들 대개 병이 있어요. …(중략)…의사를 찾아갈 처지가 못되니까 그냥 방치했다가 곧장 간경변으로 발전하고, 젊은 만큼 아차 하는 사이에 죽어버리곤 해요. ……늦기 전에 의사한테 진찰 받으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병인데 말이에요. 그치들, 불법 취업이 들통날까 봐 도통 병원에 안 가려고 떼를 써요. …구급차에 실려갈 즈음이면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지요”


이러한 그녀의 증세에 대한 언급은 ‘파이란’의 사망 원인을 보다 명확하게 만듦으로써, 허구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위장결혼이지만 어쨌든 결혼을 했기 때문에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도록 소설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소설 속 ‘파이란’은 ‘인재 파견업자에게 여자는 가장 귀한 상품’이기 때문에 ‘지방의 항구도시에는 과분할 만큼 훌륭한 종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죽어버리고 만다. 반면 영화<파이란>에서는 흥신소의 소장을 찾아가 병에 대해 호소하지만 거절당하고, 죽음에 이른다.


영화에서의 죽음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당장 아프다면 흥신소의 소장을 찾아가 병에 대해 호소하기 보다는, 창고 같았던 방을 비워 거처를 마련해 주고 구청 직원 앞에서 ‘파이란’을 보호해 주었던 세탁소 주인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 그렇지 않았던 이유는 감독의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영화 전반에 나오는 색의 이미지로 볼 때 ‘파이란’은 끝까지 ‘희고 깨끗한 여자’이어야만 했다. 즉, 완전무결한 ‘흰색’이어야 했기 때문에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은 ‘창녀’가 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은 세탁소 여직원이 되었다. ‘세탁’을 하는 행위는 정화의 이미지, 더러운 것을 맑게 하는 속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파이란’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는 ‘강재’의 모습에서 그가 ‘희어지고’ 있는 과정들을 통해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영화 속의 ‘파이란’은 아름다운 외모에 세상 물정에 어두워 평생 바가지 긁힐 일 없을 것 같고, 큰 눈과 긴 생머리를 가진 여자는 남자들의 환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남성들을 위한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러브레터>와 <파이란>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파이란>에서는 영상으로 보여지는 감정선의 조절과 시간의 흐름 등을 편집이나 연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풀어나갔다면, <러브레터>에서는 단편소설이라는 점 때문인지 빠르고 급작스럽게 결말에 도달하는 느낌이 있다. 하지만 소설이 줄 수 있는 장점인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고 여러 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인 ‘울면서 웃자니, 마른 뼈들이 무릎 위에서 달그락거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부분이 장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르지만 각각의 매력이 충분히 있는 <러브레터>와 <파이란>이다.






장면분석


-거울


 강재는 용식의 제안을 끝내 수락하고, 자고 일어나 이를 닦으며 싱크대에서 깨진 유리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본다. 엉망인 자신의 얼굴과 바닥인생인 자신의 모습을 깨진 거울을 통해 보게된다. 그 후 바로 파이란의 죽음을 알리는 경찰이 강재를 찾아온다.


두 번째 거울을 보는 장면에서는 파이란의 사망을 수습하는 동안의 정화된 자신을 파이란이 살던 방에서 직접 자신의 손으로 파이란의 거울을 통해 보게 된다. 파이란을 통해 강재가 정화되었음을 상징한다.




-용식이 대사


용식은 자신이 운영하는 클럽에 부하들을 모아놓고 혼을 낸다.
그리고 유리잔을 땅에 던져 깨뜨리고
"이거 원래대로 복구할 수 있는 사람 있어? 한번 깨지면 복구 안돼, 절대로 못해!"
뒤에 다루어 볼 외적 분석과 더 강하게 연결되지만
내적분석으로 보자면 강재의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과 회복불가능한 현실을 의미하며
강재의 최후를 암시한다고 본다.



-배 그림을 보는 강재


강재가 배 그림을 보는 장면은 두 번 등장한다.
용식이 살인을 저지르는 전후를 기준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살인 전에는 배 그림을 볼 때가 밝은 낮시간 때이지만
살인을 저지를 후에는 저녁이며 가게는 셔터가 내려져 있다.
배 그림은 보는 것은 고향에 배를 하나 살 돈을 얻어 돌아가겠다는
강재의 '드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용식의 사건에 휘말림으로써 그 '드림'이 어두운 밤과 거리감을 나타낸 셔터를
통해 멀어지고 이루기 어려워 졌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기차와 흰눈


기차는 공간적 이동을 뜻하지만 영화에서는 시간적 이동으로 자주 쓰인다.
파이란에서도 기차를 통해 과거로의 회상과 흰 눈이 내리는 환경을 섞어
순수했던 그 때의 회상과 더불어 그 때로의 회귀를 꿈꾸는 의미로 본다.









색감으로 본 전개




파이란은 한국식 발음 그대로 파란색으로 연상되는 것과 백란(白 蘭:하얀 난)의 중국식 발음에서 볼수 있는 하얀색도 또한 떠오른다. 이것이 표상하는 것은 분명히 파이란, 그녀(장바이쯔)이다. 그녀는 파
랗고 하얗다.
 


파이란은 영리한 꾀를 내어 윤락업소를 피해 세탁소에 맡겨진다. 세탁소 아주머니로부터 인간 세탁기라는 찬사를 듣는 장면에서 그녀는 파란셔츠를 입고 땀방울이 맺힌 하얀 얼굴과 빨랫줄에 ‘하얀’ 빨래들이 널려있다.




경수의 바닷에서 예술을 하자는 말에 파이란은 강재의 칫솔을 사고,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에 간다. 파란 스웨터와 강재의 결혼선물인 빨간 스카프, 그리고 빨간 깃발이 휘날리고 하얀 셔츠를 다리던 파이란은 빨간 피를 흘린다.
 



빨간 스카프는 서류상 남편인 이강재를 표상한다. 파이란의 목에 감겨있는 스카프는 강재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기다림을 나타냈지만 그 장면 말미에 나오는 빨간 깃발과 어울려 좀 다른 넓은 의미로의 해석의 공간을 열어준다.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죽음과 강재의 비극 또한 예상할 수 있다고 본다. 빨강은 보편적으로 죽음의 의미를 갖고 있고, 그 빨강 스카프의 표상은 강재이기 때문이다.


빨강은 파랑(파이란 몸)안에 잠겨 있었다. 그것이 그렇게 잠겨 있었을 때 빨강은 순수했다. 그러나 그것이 밖으로 나왔을 때 하얀(순수)은 얼룩지고 다시는 파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강재의 목에 메어져서 한껏 ‘양아치’스러움을 보여줬던 스카프가 파이란의 목에 얌전히 잠겨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양아치’적이지 않았다. 이런 미적 대비는 강재의 내면이 실은 파이란과 등가임을 형식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강재는 어렸을 때 자신에게 잘 대해 주었던 구멍가게 아주머니에게 독하게 굴지도 못하고, 후배들에게 수모도 당하는 여린 마음을 가진 삼류 양아치다. ‘늙은’ 삼류 건달 강재는 언제나 배가 그려진 액자 앞에 멈추어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배를 사서 고향에 돌아가는 꿈에 젖어서 말이다.


기차를 타고가며 파이란의 편지를 읽는 동안 바깥에는 하얀 눈이 내린다. 기차 안에서 강재는 비로소 파이란의 모습, 아니 어쩌면 잊혀졌을 지 모를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파이란의 편지


-첫 편지

강재씨에게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재씨가 결혼을 해 주셨기 때문에 계속 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계속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친절하지만 강재씨가 제일 친절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두번째 편지

강재씨에게

이 편지를 강재씨가 보시리라 확신이 없어 부치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보신다면 저를 봐주러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는 죽습니다. 너무나 잠시였지만 강재씨의 친절 고맙습니다. 강재씨에 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있는 사이에 강재씨 좋아하게 됐습니다. 좋아하게 되자 힘들게 됫습니다. 혼자라는게 너무나 힘들게 됫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항상 웃고 있습니다. 여기 사람도 모두 친절하지만 강재씨가 가장 친절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강재씨 내가 죽으면 만나러 와주실래요. 만약 만난다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습니까. 응석부려서 죄송합니다. 제 부탁은 이것 뿐입니다. 강재씨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강재씨. 안녕



외적 분석

1. 외환위기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인 1999년경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후였다. 1997년 우리나라는 'IMF사태'라는 거대한 위기를 맞았다. 1996년 말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초과하는 기록을 세우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으로 가입한 지 1년이 채 못 된 시점이었다. 기업경영과 금융 부실이 드러나 대외 경상수지 적자로 외환 보유고가 크게 떨어져 결제 외환 확보에 차질이 생겼다. 악순환은 이에 그치지 않고 외국자본이 일시에 빠져나가며, 화폐가치와 주가가 폭락하여 금융기관이 파산하고, 이어 기업의 도산이 속출하고 실업자가 양산되어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그러나 IMF의 구제금융 조건은 엄격한 재정긴축과 가혹한 구조개혁을 요구하기 때문에 금리 상승과 경기 악화, 실업률 상승 등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한국은 외환시장과 물가안정을 위한 고금리 정책과 재정 긴축은 물론, 수요 억제를 통한 경상수지 흑자 정책을 추진해 단기성 고금리 차입금인 보완준비금융(SRF) 135억 달러를 1999년 9월에 조기 상환하고, 60억 달러의 대기성차관자금(SBL)을 2001년 1월부터 상환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같은 해 8월 23일 1억 4000만 달러를 최종 상환함으로써 2004년 5월까지 갚도록 예정되어 있던 IMF 차입금 전액인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하였는데, 이는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3년 8개월 만이며, 당초 예정보다 3년 가까이 앞당겨 빚을 정리한 것이다. 이로써 외환위기를 완전히 극복하고, IMF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 1997년 외환위기 당시 39억 달러로 떨어졌던 외환보유액이 2001년 9월 현재 990억 달러에 달함으로써 세계 5위의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외환위기를 잘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IMF 관리체제에 도입하면서 대량실업, 가족해체, 사회 계층적 구조에의 충격 등이 일어났다. 수많은 충격과 인간성의 파괴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강재와 용식 그리고 경수 앞에 놓인 것은 사회 계층적 구조의 변화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이었다.

용식은 매정하고 야망 있으며 이기적이고 다혈질이며 독선적이고 의리 없는 잔혹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를 불러놓고 일장연설을 하며 “이 깨진 컵 다시 맞춰 원상복구 시킬 년 놈 있어? 없지? 깨진 다음엔 늦어. 복구 못해. 절대 못해 알아?”를 외쳐댄다. 깨진 컵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한국 경제와 외환위기의 후폭풍에 휘말린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 대사와 그의 성격이 매정하고 이기적이며 의리 없는 잔혹한 인물로 살아야만 한국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사회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였다. IMF 이후 경제상황의 악화로 사회적 불평등은 심해져 갔고 그러한 불평등은 조그마한 조직 세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강재와 용식과 경수의 고리는 IMF 이전의 시대에 안주하는 강재와 IMF를 받아들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전하려는 용식,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재2’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수로 매듭지을 수 있다.

강재와 용식 그리고 경수는 이 사회의 환영받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리고 강재는 그 환영받지 못하는 깡패 조직에서조차 무시당한다. 평생 남의 들러리나 하며 “6기통 디젤 배 한척 딱 앞세우고”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사항을 십 수 년째 되풀이하는 동네 깡패 강재,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애초에 강재가 나락으로 떨어진 건 마음이 여리고, 끈기도 없어서, 맡은 일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것이 한 몫을 했음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가진 성격의 모순과 결함은 ‘전적’으로 그의 책임인가? 그가 담겨 있는 깡패조직, 더 나아가 깡패조직을 담고 있는 이 사회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강재는 어촌 출신이다. ‘농어촌’이라고 싸잡아 부르는 용어가 지시하듯이 어촌은 농촌과 더불어 근대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한 곳이다. 노동부의 1993년부터 2001년까지의 임금구조 기본조사에 의하면 소득이 높은 임직원 및 관리자, 전문직, 기능공 및 준전문가 집단에서 평균소득 증가액인 63만 6,000원보다 많은 증가가 있었으나, 소득이 낮은 사무 종사자, 서비스 및 판매직, 농어업 종사자, 단순노무자 등의 직업집단에서 평균소득 증가액보다 낮은 소득 증가가 있었다. 특히 농림어업 종사자의 경우 8년 동안 소득 증가액이 36만원도 되지 않았다. 이러한 양상은 중간계급과 노동계급간의 소득 격차가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그것이 젊은이들이 농어촌을 떠나는 이유이고, 이러한 흐름에 따라 강재 역시 자신의 고향을 떠나온 것이다. 아무런 지식도, 능력도 없는 강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또 다른 소외집단인 지역 깡패 조직이었을 것이다.



2. 외국인 근로자 문제


한때 농어촌 출신의 공장 노동자들이 고달픈 몸을 뉘었던 가리봉동 ‘벌집촌’이 지금은 수 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중국인 노동자들의 수는 늘어났고 지금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 사회는 80년대부터 외국 인력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국내 제조업체의 인력난이 가중되어 정부와 사용자단체를 중심으로 외국 인력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91년 ‘해외투자법인연수생제도’와 93년 ‘산업기술연수제도’가 도입됐다. 그러나 이 제도들은 근로자들을 연수생 신분으로 입국시켜 노동관계법이나 산재보상법 등을 적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외국인 근로자들은 근로자로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인권침해를 받았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외국인 근로자들의 인권침해는 아직도 진전되지 않았으며,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보다는 법, 제도를 보완하자는 탁상공론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이란, 그녀는 이주노동자이다. 불법체류자를 면하기 위해 위장결혼으로 강재와 서류상의 결혼을 했고 이로써 그녀는 한국사회의 일원이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주어진 현실은 윤락가에서 몸을 팔아야 하는 인생이며, 몸을 파는 일을 피해 왔어도 한 몸 겨우 누울 수 있는 방에서 인간 세탁기로 한 겨울에 손빨래를 해야 겨우 밀린 빚을 갚을 수 있는 인생이다.


“내가 많이 아픕니다. 5달만 참아주시면 나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에 직업 관리소 소장은 “니 돈 못 받으면 내 발꼬락이 아파요.”라고 답한다. 짧은 대화 두 마디로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드러내 준다.


파이란은 영화 속에서 거듭 ‘결혼’과 ‘친절’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것은 맨주먹으로 가진 것 많은 남한 사람들에게 얹혀살게 된 외국인 노동자와 외지의 동포들이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타전해 오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어디선가 고된 일상에 아픔을 겪고 있을 그녀에게, 또는 그녀들에게 하얀 난초꽃이라는 뜻을 가진 파이란(白蘭)의 이름처럼 가녀리게 들려오는 요청에 대하여 우리의 대답이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인천은 바다 건너 온 중국의 3류 인생들이 한국의 3류 인생과 뒤섞여 사는 변두리 공간이다. 이 사회는 그러한 변두리 공간에서의 ‘강재’ 같은 인간과 ‘파이란’ 같은 인간에게 희망을 갖지 못하게 한다. 희망을 갖더라도 곧 꺾여버리고 만다. 상대보다 더욱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며, 상대를 밟고 일어서야만 끝없는 싸움에서 승자가 될 수 있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강재 같은, 파이란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결국 계급과 불평등 속에서의 노곤한 일상뿐이다.
 

반면 승자의 모습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용식은 승자인가? 그 역시 승자는 아니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야비한 수를 쓰며 발버둥치지만 발버둥 칠수록 빠져드는 늪처럼 그는 살인이라는 수렁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이 작품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하나 남은 희망만을 남겨둔다. 욕심을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의 무자비한 이기심은 판도라가 참지 못한 호기심과도 같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미 사회 속에 그들이 자초한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 온갖 악(惡)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왜곡된 사회의 울타리를 거스르고 넘는 동안 강재와 파이란의 사랑 역시 왜곡되어 버린다. ‘1999년 어느 힘든 나라’안에서 두 사람이 가진 인연의 끈이 해어지고 닳아져 버린다. 그렇지만 강재와 파이란의 연(聯)이 무의미, 무가치 한 것은 아니다. 강재의 눈물은 파이란이 남긴 마지막 편지위에 고스란히 떨어지고 그 몇 줄기 눈물은 파이란이 내민 손을 적셔준다. 파이란에게도 강재에게도, 무심하고 투박한 한 사내가 내뱉은 눈물 속에서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희망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다. 2008년, 여전히 힘든 한 사회가 있다. 철거를 앞둔 재래시장 구석, 허리 줌에서 거스름돈을 꺼내는 노정들의 땀방울은 강재의 눈물과 절묘하게 겹쳐진다. 그래. 그것은, 그래도 그것은 희망이다.











강재와 파이란의 모습을 통해 환경이라는 요소가 사람의 인생과 성격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IMF라는 아찔한 사회적 변화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순수했던 어촌의 청년이 3류 양아치가 되었던 것이고, 파이란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꾀를 내어 빨간색인 술집을 피해 파란색의 세탁소로 위장 취직을 하게 되는 것을 볼 때는 순수한 이미지와 달리 영리하고 꾀가 있는 모습이었다.
파이란은 영리하게 차선을 바꿔 자신을 유지해 갔다고 볼 수 있으나 강재는 차선 조차 변경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이 차로 꽉 막혀있었던 상황이라고 본다. 또, 머피에 법칙처럼 차선을 바꾸니까 그 차선이 더 막혀버린 경우일 수도 있다.
IMF시절에도 많은 가장들이 겪었던 모습일 것이다. 재기를 위해 다른 도전을 하지만 오히려 재산을 탕진하고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던 과거의 우리 사회 가장들의 모습이 상기된다.
IMF라는 차갑고 매서운 바람에 의해 많은 가장들이 넘어지고 쓰러졌고, 그건 한 가정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파이란은 어쩌면 그 가정의 한 아이로써, 아직은 사회라는 단어가 낯설지도 모를 나이에 급하게 사회에 뛰어들고 IMF라는 바람이 만든 파도에 휩쓸려 저 멀리 외딴곳으로 떠밀려 갔던 많은 아이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거두절미하고 <파이란>은 꼭 봐야한다.

가장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질리도록 보았고 마르고 닳도록 더 볼 영화이기에
리뷰를 쓴다는 자체가 부담이었지만 최대한 미친듯이 써보았다.
수차례 미리보기를 하며 고치고 고치기를 했지만 이젠 지쳐서 그냥 발행하려고 한다.
아쉬운 부분이 더 많지만 너무 오래 잡고 있었더니 그냥 포스팅하고싶은 마음뿐이다.
아마도 얼마후 또 다시 영화를 본 후 이 글을 수정할 것 같다.
어쨋든 길고도 길 포스팅을 읽어주셨다면 감사하오며
자료를 많이 땡겨써오고 참고를 했지만 최대한 필자의 생각을 내볼려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몰래 보고 가져다 쓰셔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naloehcy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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